인빈 김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인빈 김씨는 조선 선조의 후궁으로, 1555년에 태어나 1613년에 사망했다. 명종의 정실 인순왕후의 추천으로 선조의 후궁이 되어 숙원, 숙의, 소용, 귀인을 거쳐 인빈으로 책봉되었다. 9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특히 신성군을 총애했다. 광해군을 옹호하고 임해군의 옥사에서 소생들을 정사 공신에 참여시키는 등 광해군을 도왔다. 사후 경혜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현재 칠궁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13년 사망 - 오쿠보 나가야스
오쿠보 나가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케다 가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막부 운영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부정 축재 의혹으로 실각하고 가문이 몰락했다. - 1613년 사망 - 카를로 제수알도
카를로 제수알도는 16세기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작곡가로, 아내 살해 사건으로 유명하며 반음계적 화성과 격정적인 감정 표현이 특징인 마드리갈을 작곡했다. - 1555년 출생 - 이복남
이복남은 1555년 강원도 명주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활약하다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 1555년 출생 - 의인왕후
의인왕후는 조선 선조의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로 태어나 선조와 혼인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중 광해군을 보살피고 46세에 사망하여 선조와 함께 목릉에 안장되었다.
인빈 김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인빈 김씨 |
한글 표기 | 인빈 김씨 |
한자 표기 | 仁嬪 金氏 |
로마자 표기 | Inbin Gimssi |
존칭 | 저경궁(儲慶宮) |
시호 | 경혜(敬惠) |
가문 | |
본관 | 수원 김씨 |
아버지 | 김한우 |
어머니 | 전주 이씨 |
혼인 정보 | |
배우자 | 선조 |
자녀 | 4남 5녀 |
아들 |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 |
딸 |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
생애 정보 | |
출생일 | 1555년 3월 31일 (양력) |
사망일 | 1613년 11월 30일 (양력) |
묘소 | |
능묘 | 순강원(順康園)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
2. 생애
1555년 태어나 어린 시절 궁중에서 양육되었다.[1][2][4]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추천으로 선조의 후궁이 되어 1573년 숙원으로 책봉되었고,[4] 이후 숙의, 소용, 귀인을 거쳐 1604년 정1품 인빈에 이르렀다. 1577년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슬하에 4남 5녀를 두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궁궐을 떠나 사가에서 지내다 1613년 59세로 사망하였다.[7]
2. 1. 출생과 가계
1555년(명종 10년) 음력 2월 29일, 김한우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1][2] 외할아버지 이효성은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로, 왕실의 일원이었다. 이 때문에 인빈 김씨는 선조와 외가 쪽으로 14촌 남매뻘이 된다.[1][2] 인빈 김씨의 언니는 신경과 혼인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훗날 광해군의 후궁이 된 소원 신씨이다.[3]어릴 때 먼 친척인 경빈 이씨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이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눈에 띄어 선조의 후궁으로 추천되었다.
2. 2. 후궁 시절

어릴 적에는 이종 언니이자 명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이씨에게 맡겨져 궁중에서 자랐다.[4] 이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눈에 띄어 인순왕후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고, 인순왕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4]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11월 12일, 인목왕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함께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인빈은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또 다른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77년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의 총애는 인빈에게 집중되었다. 인빈은 공빈 김씨가 생전에 잘못한 일들을 선조에게 이야기하며 공빈에 대한 선조의 감정을 식게 만들었다.
> 소용(昭容) 김씨(金氏)가 【''뒤에 인빈(仁嬪)이 되었다.''】 곡진히 보호하면서 공빈의 묵은 잘못을 들춰내자, 상(선조)이 더 이상 불쌍히 생각하지 않고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김소용이 특별한 은총을 입어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니 이는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 —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5월 1일(무자)
이 시기를 이용하여 인빈의 남동생인 김공량은 이산해 부자와 손을 잡고,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던 정철 등 서인 세력을 유배 보내고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건저의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총애도 점차 줄어들었다.[6]
선조는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신성군을 매우 아꼈고, 인빈 역시 신성군이 세자가 되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총애받던 신성군은 피난길에 올랐던 의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5]
이후 인빈은 선조의 미움을 받던 광해군을 여러 차례 변호해주었다. 임해군의 옥사가 있을 때에는 인빈 소생의 아들들이 정사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이러한 도움에 대해 광해군은 훗날 ‘내가 서모(인빈)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고마움을 표했다.[6]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인빈은 상을 치른 뒤 궁궐을 떠나 사가에서 지내다가 1613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사망과 사후
1613년(광해군 5년) 10월 29일,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는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7]《광해군일기》[중초본] 71권, 광해 5년(1613년 명 만력(萬曆) 41년) 10월 29일 (계축) 기록에는 인빈 김씨의 졸기가 실려 있다. 졸기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인빈은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의창군 등 네 명의 왕자와 다섯 옹주를 낳았으며, 술수가 있고 미봉을 잘하였다고 평가되었다.
- 동생 김공량이 이산해와 결탁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대신을 모함하는 등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와는 본래 틈이 있었으며, 공빈이 죽자 인빈이 선조의 총애를 대신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해군 형제는 인빈을 원망하기도 했다.
- 그러나 광해군이 동궁 시절 선조의 뜻을 자주 잃었을 때, 다른 후궁들과 달리 인빈만은 유독 광해군을 후하게 대하며 선조에게 변호해주었다. 유영경이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광해군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인빈의 변명으로 풀어진 일도 있었다.
- 광해군은 즉위 후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이 때문에 인빈이 죽을 때까지 정원군과 의창군 형제는 무사할 수 있었고, 임해군의 옥사 때에도 인빈이 궁중에서 힘쓴 덕분에 정사 공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인빈 김씨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장사지냈다.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격을 높인 것에 맞추어 인빈 김씨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의 호칭을 원(園)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이라 하였다. 또한 사당 역시 방(房)에서 궁(宮)으로 격상하여 궁호를 저경궁(儲慶宮)으로 올렸다. 이때 인빈이 입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숙의 이씨도 경빈(慶嬪)으로 추증되었다.[8]
1908년에 왕의 사친이었던 여러 후궁들의 신주를 모두 육상궁으로 옮기면서 인빈 김씨의 신주 역시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1년 10월 25일 순강원은 사적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3. 1. 부모
관계 | 성명 (한자)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부 (父) | 김한우 (金漢佑) | 수원 김씨 | 1501년 ~ 1577년 | 아버지: 김순은 (金順銀) 어머니: 고령 박씨 | |
모 (母) | 전주 이씨 (全州 李氏) | 전주 이씨 | 미상 | 아버지: 이효성 (李孝性)[9] 어머니: 미상 |
3. 2. 배우자
한성부 인달방 도정궁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침